창작후기
밭농사, 글농사
― 빚을 갚는 마음으로.
우리 집 뒤울안에는 놀고있는 땅이 있다.
상추 심고 고추 심고 들깨를 심었다. 파도 심고 머위도 심었다.
백로가 되자 김장배추와 무도 심었다.
밭농사 일년 만에 나름 물건 하나를 건졌다. 땅은 이렇다. 먹거리뿐만 아니라 쓸거리도 모름지기 선사하는 것이다.
땅만큼 진실한 것도 없다. 뿌린 만큼 거두게 하고 땀 흘린 만큼 내여준다. 놀면 굶는다는 진리를 땅은 수시로 깨닫게 해준다.
문학도 그렇다. 책을 읽지 않고 고민하지 않는다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읽고 읽고 또 읽어야 할 것이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번 읽고 고민하지 않은 글이 가장 무섭다.
×××
홍란선생이 생각난다.
나는 홍란선생에게 본의 아니게 미안한 짓을 한 게 있다. 그 일은 지금도 마음에 남아 나를 괴롭힌다. 아마 홍란선생도 고까워할 것이다. 그때 나는 왜 그랬을가.
홍란선생이 원고청탁을 해왔다. 나는 고려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당시 <도라지>는 소설만 취급하는 소설전문지였다. 조선족잡지 중에서 가장 핫한 잡지라 할 수 있었다. 소설전문지였던 만큼 편집들의 노력과 열성도 대단했다. 잡지의 생명은 작가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어떻게든 작가한테 글을 씌우고 원고를 받아갔다. 특히나 홍란선생은 전화재촉으로 유명한 분이였다.
대답은 했지만 이상하게 소설이 씌여지지 않았다. 마치 도깨비가 들어앉아 장난질을 하는 것만 같았다.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단편 하나를 빨라야 한달, 늦으면 두달에 마무리하는 나의 속도로 봐서 언녕 시작을 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원고지 한칸도 메우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가이드라인을 넘기고 말았다.
솔직한 고백을 하자면, 나는 좀 게으르다. 아니, 많이 게으르다. 그러나 그래서 글이 씌여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게으르다고 해서 글마저도 씌여지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글쓰기를 싫어한다. 글쓰기가 너무 힘든 까닭이다. 그럼에도 내가 문학을 하는 것은 문학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글에서 나는 문학을 내가 선택해서 했다기보다는 떠밀려서 한 케이스라고 피력한 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글을 쓰지 못한 면죄부로 되지는 못할 것이다.
드디여 홍란선생에게서 전화가 왔고 나는 떠듬떠듬 채 못썼노라고 말했다. 채라고 했다. 마치 내가 글을 쓰다가 못쓴 것처럼 말이다.
그럼 언제까지면 되요? 일주일 시간을 더 드리면 되겠어요? 홍란선생이 데드라인을 제시했고 나는 된다고 대답했다. 나는 그때라도 솔직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솔직하지 못했고, 일을 더 크게 만들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 법이다. 일주일 후 홍란선생이 다시 전화가 왔을 때 나는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다음 기에 봅시다, 했다. 결말이 마음에 안들어서 안되는 것처럼 말했던 것이다. 대미까지 만들어놓고 글을 쓰는 내 성격상 결말이 안되는 경우는 없는데도 말이다.
그때라도 솔직해졌더라면 다음 기까지 안가도 될 것을 나는 기어이 다음 기까지 끌고 갔고 결국 또 같은 상황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그제는 홍란선생도 뭔가를 깨달았던지, 아니면 나한테 실망을 했던지 더 이상 전화를 해오지 않았다.
나는 일이 거기서 끝나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아니였다. 반년쯤 지난 어느 날 홍란선생이 또 전화를 해왔다. 받아보니 회의차 백산호텔에 들어있다는 것이였다. 저녁에 간단히 한잔 하자고 했다.
아, 기껏 미안한 일을 저질러놓고 나는 왜 또 그 청에 응했던가. 원고이야기가 나올 것을 미루어 짐작을 했어야지 말이다. 어이없게도 나는 술 한잔 얻어먹고 또 한번 소설을 쓰겠습니다,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미환팔 일은 글구멍이 완전 막혀버린 것이였다. 그때부터 나는 홍란선생과 숨박꼭질을 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았다. 그런 일이 아마 몇달은 지속됐을 것이다. 급기야 홍란선생이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몇년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갑자기 홍란선생이 전화를 해왔다. 나는 엉겹결에 전화를 받았다. 그때는 <도라지>가 소설전문지로부터 다시 원래의 잡지로 돌아와있던 때였다.
몇마디 안부 끝에 홍란선생은 수필을 써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이미 과거로부터 영양분을 섭취했던 터라 많이 성장해있었다. 나는 단마디로 거절했다. 못쓰겠습니다.
홍란선생이 발칵 화를 냈다. 참고 참았던 것이 한꺼번에 올라왔던 모양이다. 우리가 선생한테 못해준 것이 뭔가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도대체 왜 이러세요? 이제는 수필을 써달라고 해도 안되나요?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정 이럴 거면 절연합시다!
절연?!
나는 깜짝 놀랐다. 절연이라니?! 나는 홍란선생이 이렇게 쎄게 나올 줄을 몰랐다. 이런 초강수를 둘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나는 쓰겠습니다, 했다.
오후 품을 들여 “목동의 눈에도 소가 있네” 라는 수필을 썼다. 그걸로 후날 수필 대상인가를 받았던 기억이다.
1년 후인가, 2년 뒤 또 한번 청탁이 왔었는데 이번에는 홍란선생이 거절했다. 무슨 소설 내용이 이리 험해요, 제목마저도 도발적입니다, 우리더러 어떻게 실으라고요, 하며 안 좋은 소리를 했다.
서운했을 것이다. 고까웠을 것이다. 미웠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를 믿고 청탁을 한 홍란선생에게 임기 내내 소설 한편을 못 써줬던 것이다. 홍란선생이 퇴직했을 때는 이미 후회막급이였다.
그 일 때문에 나는 상학선생이 주필이 됐을 때 쓰기 힘든 상황임에도 열심히 써주었다.
그리고 향란주필 때에도. 이번 소설 “불”은 아마 내 생애 가장 최단기간내에 쓴 것이 아닌가 싶다.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썼다.
빚을 갚는 마음으로.
×××
그니가 없는 빈 집에서 70여일을 지냈다. 그때 채소를 보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다. 결국 나는 밭농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없는 밭농사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글농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
대파를 본다. 두번 옮겨 심은 대파다.
대파는 옮겨 심어야 굵어진다. 겨울을 나면 더 굵어진다. 비로소 대파가 되는 것이다.
고통은 생각하게 만들고 시련은 강인하게 만든다. 루쏘는 힘들게 살아온 사람한테는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말했다. 실로 지당한 말씀이다.
할빈에 오기까지 나는 세번 자리를 옮겼다. 앞으로 또 어떻게 옮겨질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옮겨질 때마다 대파처럼 더 굵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대파한테서 배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