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손발

시내물
创建于2023-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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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오관은 어느 하나가 못생겨도 미관에 자못 결정적인 영향이 미친다. 다행히 미용과 성형으로 그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어서 사람들은 자신의 외모에 얼마간의 만족을 느끼게 된다. 

    남들에게는 배부른 타령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얼굴보다 손발의 생김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다. “녀자의 손은 오관 다음으로 미를 가늠하는 자”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여 손이 예쁜 사람을 보면 은근히 부럽다. 손을 보면 또 그 사람의 인생을 어림짐작으로 엿볼 수 있는데  섬섬옥수를 가진 녀자는 별 고생을 하지 않고 손에 별반 물을 묻히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고 손이 나무껍질처럼 터실터실하거나 손마디가 나무옹이처럼 마디졌다면 이런 사람은 고달픈 인생의 쓴맛을 맛 볼 대로 맛 보았을 것이다.  

   나는 녀자 키로는 작지도 크지도 않은 159cm이지만 손발은 유난히 작다. 손은 어찌나 작은지 주먹을 쥐면 병아리 같다. 거기다 손등은 살가죽이 늘어져 주름살이 주굴주굴하다. 한마디로 손이 볼품없이 밉게 생겼다. 22.5cm밖에 안되는 발은 살도 얼마 붙어있지 않은 데다가 발폭이 좁아 발에 맞고 마음에 드는 신을 고르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 디자인이 예쁜 하이힐은 제일 작은 싸이즈라해도 내 발에 맞는게 거의 없어 나는 하이힐을 별로 신어보지 못했다. 발은 그럭저럭 양말이나 신발 속에 움츠리고 숨어있을 때가 많지만 손은 그럴 수 없기에 나는 미운 손 때문에 은근히 신경이 쓰일 때가 많다. 20대에 벌써 조글조글 주름이 잡힌 내 손은 60고개를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야 거의 나이에 걸맞는 것 같다. 얼굴보다 손등에 더 주름이 주굴주굴한 내 손을 보고 사람들은 내가 젊어서 험한 일을 한 녀자인 줄로 안다. 설겆이를 할 때 고무장갑을 끼지 않았구나 하는 걱정을 내비치거나 손크림을 자주 바르라고 조언을 하기도 하면서 좋다는 손크림을 추천하기도 한다. 사실 비싼 손크림을 매일 발라도 이미 거칠어진 손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은 시골이였지만 비농호였기에 어머니 혼자 몫으로 도급 맡은 밭이 얼마 되지 않아 방학이면 다른 애들처럼 부모를 도와 농사일을 해야 할 처지도 아니였고 터밭 채소농사도 부지런한 어머니가 거의다 혼자 도맡아하였기에 도우느라고 땡볕에서 기음을 맨 기억도 없다. 그런데도 내 손은 거칠고 주름이 얼기설기 잡혔다.  

    일찍 어려서부터 객지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느라 혼자 손빨래를 하여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하니 그 때 친구들의 손도 내 손처럼 거칠지 않았다.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나 설겆이를 하는 법을 모르던 40년전이였는데 생각해보니 그 때 내 손은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아마도 어렸을 적 손을 얼군 탓이였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내가 소학교 2,3학년이였던 때의 겨울로 기억된다. 어머니가 막내 이모의 결혼식 때문에 어린 두 동생을 데리고 왕청에 있는 외가집으로 가고 집에는 나와 아버지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공사소재지에 회의를 가야 해서 나 홀로 집에 있게 되였다. 어린 내가 걱정된 아버지는 30리를 길을 걸어서 저녁 늦게 집에 도착해서는 이튿날 새벽에 일찌감치 밥을 지어놓고 다시 그 먼길을 걸어가군 하였다. 철부지인 나는 학교 가는 시간에 맞춰 밥을 먹고는 그래도 밥그릇을 씻고 밖에 구정물을 던지고 찬물에 씻은 손이 마르지도 않은 채 학교로 뛰여갔다. 아버지가 밤 늦게 오는 날에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찬물에 쌀을 씻어 쇠가마에 앉히고 불을 지펴 밥을 지었다. 늘 밥물을 잘 맞추지 못해 진밥이 아니면 고두밥이 되였고 부엌아궁이의 장작을 제대로 피우지 못해 밥이 설기도 하고 타기도 했다. 그 엄동설한에 젖은 손으로 바깥으로 들락거렸더니 한 이삼일이 지나 손이 알알해나면서 손등이 갈라지고 피고름까지 흐르더니 종처가 똥똥 부어올랐다. 어머니가 돌아와서 보고는 가슴 아파하였지만 병원도 없는 시골에서는 그냥 ‘조개약’이라는 것을 사다가 발라줄 뿐이였다. 며칠후 생채기가 난 손은 나아졌지만 아마도 얇은 내 손등 살가죽은 그 때 얼어서 피부조직이 많이 상했는지 아니면 회복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그 후 몇년간 겨울만 되면 손등이 가려웠고 그러면 저도 모르게 자꾸 긁다 나니 가뜩이나 변변찮은 살가죽이 성해있는 날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그 해 겨울 처음으로 혼자 밥을 지은 후부터 내가 부엌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지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밭에서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나더러 저녁밥을 지으라고 독촉하였다.

    어느 여름날, 시골마을 학교에 20명 가량 되는 참관단이 왔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아버지는 우리 집으로 손님들을 모시고 왔다. 그 날 따라 강건너 밭에 일하러 간 어머니는 ‘벤또’를 사가지고 갔기에 집에 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손님들을 구들에 모셔놓고 사업회보인지 무슨 얘기를 하면서 나에게 쌀 몇바가지를 이남박에 씻어서 가마에 안친 다음 물이 손등까지 올라오게 부으라고 시켰다. 나는 겁도 없이 20명이 넘는 손님들의 밥을 짓기 위해 가마목에 다가갔다. 부뚜막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커다란 가마솥에 쌀을 안치고 아버지에게 밥물을 가늠해보였다. 그리고 내 주먹보다 더 큰 감자를 깎아 나박나박 썰어서 국까지 끓여 제법 그럴듯한 밥상을 차렸다. 키가 겨우 부뚜막 높이를 넘는 내가 얼마나 안차고 당돌하게 보였던지 참관단 손님중 한사람은 나이를 물어보더니 기특해하면서 공책을 사라고 용돈을 쥐여주는 것이였다. 그 때 나는 열살이였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부엌일을 하여서 내 손이 엉망이였을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보기도 하지만 조그마한 발도 바싹 여위고 살가죽만 붙어서 뼈가 앙상한 걸 보아서는 내 손과 발은 천성적으로 밉게 생긴 것 같다. 

     발도 개구쟁이 주인 때문에 많이 욕보았다. 얼음이 금방 풀려 뼈속까지 찬 물속에 맨발로 들어서서 남자애들과 함께 기름개구리를 잡기도 하고 여름이면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느라 첨벙거리다가 강가에 벗어놓은 새 신을 잃어버리고 맨발로 집에 와서는 어머니한테 혼찌검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작은 발로 타박타박 걸어 이악스럽게 산고개를 넘고 강을 건너 학교로 뛰여갔다. 공사소재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주말에 집에 오느라 하다가 뻐스시간을 놓치면 친구들과 함께 30리 산길을 걸어서 어둑어둑할 때에야 집에 도착하군 했다. 지금은 간혹 호랑이, 표범이 나타난다는 그 산길을 40여년전에는 두려움도 모르고 오르내렸다. 

  일찍부터 부엌일에 손을 댔다고 하여 지금 나의 료리솜씨가 뛰여난 것도 아니다. 그저 집식구들의 하루 세끼를 제때에 차려줄 뿐이고 반찬투성을 하지 않는 식구들 덕분에 지금까지 간신히 주부의 체면이 서고 있다. 간혹 집에 손님이 오면 주방에서 우왕좌왕하면서 두세가지 료리를 볶는데도 애를 먹는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일찍 부엌일에 손을 대서여인지 무슨 음식이나 스스로 해먹으려는 대담한 시도는 잘한다. 결혼생활을 해서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빨간 고추를 해볕에 곱게 말려 빻아서 김장김치를 담갔다. 어깨너머로 배운 어머니의 음식솜씨를 본 따서 웬만한 음식은 직접 해먹지 절대 사먹지 않는다. 고추순대, ‘입쌀밴세’, ‘감자밴세’ 외에 물만두, 찐만두는 다 내 손으로 반죽하고 속을 다져서 한다. 그러니 내 손은 얼굴보다 더 고생하는 것 같다. 

    얼굴은 일주일 한번씩 피부관리를 받아서인지 나이에 비해 주름도 적고 하야말쑥하다는 칭찬을 자주 듣지만 손만은 그냥 엉망이다. 아무튼 자그마한 내 손과 발은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을 했으니 좀 ‘호강’을 시켜야 하겠는데 비닐장갑을 끼고 무침을 하다가 간을 맞추느라 꼈다 벗었다 하기가 번거로우면 음식은 그래도 내 손맛이야 하고 자화자찬하면서 맨손으로 비비고 만다. 손톱도 얼굴과 마찬가지로 화장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내 식구가 먹는 음식을 하는 손인데 행여나 하는 부질없는 생각에 여태 메뉴큐어 한번 발라보지 못했다. 우리가 결혼할 때는 금반지를 주고받을 때가 아니기에 결혼반지라는 것도 못 껴본 몽톡한 손가락, 나중에 옆구리 찔러 두루 얻어 꼈지만 주방에서 일할 때면 불편하게 느껴져 벗어놓고 일할 때가 많다. 

    나이가 드니 예쁜 신발보다 발이 편안한 려행용 신발을 더 선호하게 된다. 이렇게 못생긴 손발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못난 짓은 하지 않았다. 미운 손으로 하얀 분필가루가 묻은 교편을 잡고 30여년 동안 학생들에게 인생의 바른길을 가리켜주었고 그들이 내 품을 떠날 때면 밝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손으로 힘껏 받쳐주었다. 선생님의 따듯한 손길을 잊을 수 없다는 제자들은 이젠 만나면 힘있게 덥썩 나의 작은 손을 잡고 놓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못난 발로 정열적인 교원생애에 또렷한 발자국을 곱게 찍었다. 지금 나는 못생긴 손으로 나의 또 다른 삶을 설계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내 작은 발에 꼭 맞는 편한 신발을 신고 가보지 못한 인생의 려행길을 멀리 걸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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