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최소천
마음속 깊이 간직해두었던 소중한 추억들은 때로는 세월의 저편 언덕으로 손짓하여 잠간이나마 삶의 지평선 아득한 곳으로 사색의 아지랑이가 어리게 한다. 그 추억들에 나의 꿈이 도색되여 더욱 황홀할 때가 있었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여러번 꿈이 바뀐다고 한다. 어린시절, 마을 합작사(상점) 에 진렬된 상품을 보면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이 판매원의 소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장차 어른이 되면 판매원이 되여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차지하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가 시골마을에 온 현문공단의 공연을 보고는 엉뚱하게도 무용수가 되려는 꿈을 꾸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책읽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소설에 매료되여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꿈 많던 시절...)
아마도 문학에 대한 동경은 내가 제일 아름차게 가진 마지막 꿈이였던 것 같다. 고중 때, 조선어문선생님이 가끔 나의 작문을 칭찬해주면서 그 꿈은 더욱 확고해졌다. 당돌하게 그 작문들을 신문사에 투고하였지만 바다에 돌을 던진 격이 되였다. 그 때 모교의 조선어문선생님 가운데는 이미 작가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녀선생님이 계셨는데 우리 학급을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랑송도 아나운서 못지 않게 잘하여 인기가 대단하였다. 나는 조선어문과목 대표였던지라 사무실을 자주 드나들면서 그 선생님과 조금 안면이 있었다. 그 때 만약 선생님을 찾아가서 나의 작문을 좀 수정했더라면 맹랑하게 거절당하는 서운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숫기가 없어 도무지 찾아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후 내가 교원이 되였을 때 선생님의 작품 한편이 고중교과서에 수록되였는데 나는 학생들에게 그 과문을 가르칠 때마다 선 생님을 떠올리면서 열심히 강의하였다.
문학에 대한 꿈과 나의 현란한 미래를 상상하며 나는 고중을 졸업할 때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지원함으로써 꿈을 향한 스타트선을 밟았다.
조선언어문학학부, 그 곳은 문학을 지향하는 청춘들의 꿈의 터전이였다. 우리 학급도 례외가 아니였다. 학생시절에 벌써 묵직한 문학상을 받아안은 문학도가 있었으니 말이다.
꿈의 궁전과 같은 대학에서 리상을 품고 청춘의 랑만을 동반한 4년은 어느덧 흘러가고 우리는 졸업배치에 따라 자신의 꿈과 상관이 있든 없든 새로운 곳에서 삶의 궤적에 따라 직장생활에 적응해갔다. 나도 한 기업중학교에 배치를 받아 평범한 교원생애를 시작하였다. 교원생활을 열어가면서 첫 1년은 수습기간이였기에 수업실기능력 제고를 위하여 교수안 준비, 수업 청강 등으로 바빴다. 또 1년이 지나 담임교원직을 맡게 되면서 항상 시간에 쫓기여 나는 교과서와 교수참고서를 탐독하는 외에 독서를 전혀 못했다. 그후 결혼과 육아로 바삐 보내다보니 내 꿈은 추억 속에서 점점 더 희미해져갔다.
그사이 이미 시인으로, 기자로, 편집일군으로 두각을 나타내는 동창들의 소식이 가끔 전해왔다. 하지만 나는 교원직업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해서부터 오직 한 우물을 파면서 학생들과 희로애락을 같이하였다. 조선어문수업, 대학입시지도와 함께 나는 학생들의 글짓기에도 왼심을 썼다. 몇몇 학생들과 글짓기로 도탑게 쌓은 정은 오늘까지도 끈끈하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20여년전, 금방 고중에 입학한 학생들에게 내준 첫 글짓기 숙제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화자라는 녀학생의 글이 하도 마음에 들어 나는 본보기글로 점 찍고 글짓기총화를 지으면서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읽어주었다. 그후부터 화자는 글짓기에 더욱 열성을 보이더니 전국조선족학생글짓기콩쿠르에서 금상을, «중학생» 잡지사에서 조직한 글짓기응모에서도 은상을 수상하였다. 모두 선생님의 덕분이라면서 감사해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의 고중시절의 꿈이 상기되였다. 화자에게 작가가 되는 꿈을 가져보는 것은 어떠냐고 넌지시 물어보았더니 일단은 법률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였다. 나중에 추리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이기에 먼저 법과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였다. 리과생이였던 화자는 법률학과를 지원했지만 아쉽게도 모 일류대학 경제학과에 합격되였다는 입학통지서를 받았다. 그래도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화자는 대학에 가서 조선족생활수기응모에서 입상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대학 졸업후 몇해 동안 련락을 가졌는데 그만 전화번호가 바뀌면서 그녀의 소식이 묘연해졌다.
(드디에 적성에 맞는 직장을 찾은 제자와 함께...)
나는 학생들의 글짓기 흥취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그들이 평시에 쓴 글중에서 좋은 글들을 선택하여 부지런히 여러 간행물에 투고하였다. 그들의 한편, 한편의 글이 신문, 잡지에 실릴 때마다 가장자리에 박힌 지도교원의 이름을 보면서 나는 학생들 못지 않게 희열을 느끼군 했다.
10년전에 졸업한 련화라는 학생의 글짓기열정은 누구와 비길 수 없을 만큼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다른 학과목 성적이 걱정될 정도로 련화는 글짓기에 푹 빠져있었다. 한 학기에만 몇편씩 써오는 글을 수정하여 편집부에 보내고 보니 고중 3년동안에 응모에서 수상한 작품까지 합치면 15편이나 되였다. 련이는 꿈을 안고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였으며 한 학기동안 외국에 가서 교환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영예도 누렸다. 졸업후 신문사 기자로 있다가 지금은 일터를 옮기고 새로운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글짓기는 문과생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리과생 지강이는 고중 3년 동안 줄곧 전교 1등을 차지하던 학생이였다. 고중 1학년 첫 학기중간시험에서 조선어문시험작문이 남달라보여서 수정하여 간행물에 투고해주었더니 글짓기에 더욱 열을 올리였다. 평소의 숙제로 내준 작문은 물론 매번 시험 때마다 쓴 작문은 본보기글로 선정되여 학급에서 랑독되였고 많은 글들이 신문, 잡지에 투고되였다. 지강이는 글감이 떠오를 때마다 열심히 써서 응모에 참가했는데 장원상, 금상 등 묵직한 영예를 받아안았다. 대학입시에서 형제학교 학생보다 총점 1점이 높아 그 해 전시 리과장원으로 뽑혔는데 조선어문성적이 148점이였다. 아마도 작문에서 높은 점수를 맞아 조선어문성적이 그렇게 높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시상식에서 찰칵...)
나는 늘 학생들에게 헬린 켈러의 “장님으로 태여난 것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시력이 있되 꿈이 없는 사람이다”는 말을 들려주면서 아이들이 마음속에 꿈을 간직하도록 고무해주었다.
그렇다, 나에게도 10대 시절에는 꿈이 있었다. 어느 순간 나는 가슴속에서 메말라가는 꿈의 씨앗을 떠올렸다. 내가 학생들의 꿈을 운운하면서 나의 꿈을 잊고 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였다. 그러고보니 여태 내가 쓴 글이란 유관 잡지에 실린 두편의 교수론문뿐이였다.
학생들의 글짓기열성은 메마른 나의 꿈에 물기를 촉촉히 뿜어주었다. 글짓기란 배움의 길에서 나의 뜻을 잘 따라준 열성 있는 제자들의 덕분에 나는 까마득해진 꿈의 끝자락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꿈의 스타트선에 나섰다. 학생들과 맺은 소중한 인연들이 나의 작품속 소재가 되여 교원생애의 희로애락을 담은 글이 되였고 나의 평범한 일상들을 그려낸 수기들도 속속 발표되였다. 그리고 행운스럽게 응모에서 수상하는 영예도 지니게 되였다.
나의 꿈이 이루어졌다고 말히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는 문학이란 높은 ‘문턱’너머에 성큼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요즘 퇴직후의 느긋함 속에서 재미 삼아 즐겁게 쓰고 있는 글들은 따분한 생활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행복에 잠기게 한다. “이젠 선생님의 이름을 고쳐서 작가선생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하고 응원해주는 련화에게 나는 작가의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화자의 추리소설이 세상에 나오는 꿈도 가져본다.
(아침노을처럼 ...)
내 꿈의 잔영이 붉은 석양빛처럼 타오르고 사랑하는 제자들의 꿈이 아침노을처럼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본다.
언젠가 나의 꿈도 이루어지겠지.
«청년생활» 중학생판 2023년 6기